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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이 사람에게 있지만 요즘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를 띄워두고 사는 것이 서로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용한 곳을 주로 찾아다니면서 오래간만에 여유도 느껴보고 있습니다.  물론 금전적으로는 여유롭지는 않지만 시간만큼은 충분하게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주변에 있는 역사적인 공간을 찾아가면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좋습니다. 

 

계룡에는 사계 김장생 고택만 있는줄 알았는데 모원재라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8호도 다로 있었습니다. 이곳은 의정공 김국광을 모신 곳으로 재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모원재는 작년 11월까지 철거공사와 모원재 동재 보수 및 복원을 통해 다시 공개된 것입니다. 

김국광은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 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복원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깔끔한 모습입니다. 문화재는 계속 복원하고 관리가 되어야할 가치가 있는 우리민족의 자산입니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입니다. 중앙에 듬직하게 세워져 있는 고택은 옛날의 그 고택의 풍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유일하게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이런때야 말로 우리지역의 문화재를 찾아다니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안가지고 있을 이런 소중한 자료는 이런때에 빛이 나는 법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바뀌고 있지만 이런 시간이 괜찮네요.  원래부터 이렇게 잘 돌아다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조 원년(1623)에 지은 모원재는 앞면 4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건물에서 모시는 김국광은 정유년(1477, 성종 8)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1478, 성종9)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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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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