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지역을 활성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모든 지도자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는 서산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사람은 최치원이라고 합니다.  28세 때 당나라 관직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인 통일신라로 돌아옵니다. 신라말 진성여왕 때 부성군 태수 부임하며 서산에서 7년간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데요. 

부성사라는 이정표를 보고 안쪽으로 들어가봅니다. 서산은  부성군의 명칭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서령군, 서산군으로 바뀌고 관청도 부성산성에서 현재의 서산시청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역작으로는 계원필경과 사산비명이 있는데요.  사산비명은 신라에 귀국한 후 비석에 남긴 네 편의 글로 네 군데의 산 이름을 따서 '사산비명'이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한그루의 고목이 듬직하게 서산의 부성사의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최치원의 글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그가 쓴 글의 목록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당나라 문인들이 그의 글솜씨를 질투하였을 정도라고 합니다.  

부성사는 크지는 않은 사당이지만 서산에서 머물렀을 고운 최치원를 기릴 수 있는 서산의 대표적인 공간입니다.  

이곳 외에도 고운 최치원은 본래 부춘산내의 상부,중부 아래 부분에 3개의 암자를 건립하였으나 조선 말엽 상부와 중부에 있는 암자가 폐사되고 현재의 사찰만 남아 삼선암이라 불리어 오던 중 1987년 삼선암을 서광사로 개명한 곳에도 머물렀다고 합니다.  

안쪽에는 머무를 수 있는 건물과 내삼문쪽으로 들어가면 매년 고운 최치원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53세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건 그의 마지막 글을 통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경주 최 씨의 시조 최치원은 불혹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다시 부성사의 내부를 돌아보고 부성사 앞에 세워져 있는 고운 최치원선생의 비를 만나보기 위해 가봅니다.  내부의 건물로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으며 외삼문, 내삼문, 동재, 서재 등의 부속 건물이 있고 그가 직접 쓴 ‘과선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선조 때 그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는 유림들이 ‘도충사’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가 흥선대원군 때 훼손되었다가 순종 1년(1907)에 새단장하였다고 합니다. 

나무가 상당히 커서 그런지 그늘이 넒은 공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부성사(富城祠)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있는, 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보리농사가 끝나고 나면 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데요. 서산태수였을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은 서산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았을까요. 

728x90
반응형
Posted by 느린세상걷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