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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개태사이지만 원래는 개태사지였었죠. 왕건이 창건했지만 고려 태조 19년 (936)에 창건된 사찰로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국립 개국사찰로 알려져 왔습니다. 개태사지자리에 계속 증축하여 지금은 옛날 모습을 되찾고 있는 느낌입니다. 태조는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쫓아 황산(黃山) 숫고개를 넘어가서 마성에 진을 친 뒤 신검에게 항복받고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후삼국 통일이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지은 사찰 건물들이 있다고 해도 이곳은 국보 213호 금동대탑, 보물 제219호 삼존석불입상, 충남민속자료 제1호 철확, 충남문화재자료 제247호 5층 석탑과 제275호인 석조, 충남도유형문화재 제91호 비로자나불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곳입니다.

 

 

아주 자그마한 돌다리이지만 개운교라는 이름이 붙여진 다리입니다.

 

 

개태사에서 개태(開泰)는 태평의 시대를 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오랜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번영을 염원한 것으로 이어 황산을 하늘의 보호를 받은 산이라고 하여 천호(天護)라고  바꾸기까지 합니다. 좌측에 있는 8각형의 건물이 태조 왕건의 진영을 봉안했다는 어진전입니다.

 

 

새로지은 건물 3동이 자리하고 있네요.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는 바 전자는 부처를 섬김이요 후자는 하늘, 오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김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지와 의식의 가감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고 이 양대 제전을 군신동락하여 경건히 행하라.”

 

 

개태사 오층석탑입니다. 특히 개태사터에서 발견된 석축을 보면 왕건 시대 초창기 사찰 건축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석축(石築)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왕건이 국력을 기울여 조성한 사찰이 개태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네요.

 

지금 개태사 사찰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개태사지는 한강 이남에 존재하는 고려시대 유적 가운데 역사적으로 단연 최고의 유적이라고 부를만큼 중요한 사찰로 자리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먹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그 유명한 개태사 철확입니다. 개태사에서 가장 중요한 아미나 삼존석불인 개태사지 석불입상(보물 제219호)을 만날 수 있는데 본존불 몸체는 법의는 한쪽 어깨만 둘렀고, 손 모양은 중생을 보호해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의 기상이 느껴집니다.

 

 

이 거대한 철확은 지금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고려 태조 왕건이 승려 5백여 명이 밥을 지어먹을 솥으로 내려주었지만 개태사가 폐허가 된 후 방치되어 있다가 추후 수습되어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높이가 97cm, 직경 290cm, 둘레 628cm에 이릅니다.

 

 

경내에 자리한 아담한 불상의 모습에 눈길이 갑니다.

불상이라기보다 신자의 느낌이 물씬풍겨납니다. 투박하게 만든것 같지만 서민을 보다듬어 줄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계백과 김유신이 마지막 국가의 운명을 걸고 만났던 황산벌은 시간이 흘러 고려 9만 대군과 사기를 잃었던 후백제 5만 군대가 마지막으로 결사항전 곳입니다. 수많은 원혼을 달래려고 세웠던 개태사의 전성기에는 승려가 무려 1,000여명이 기거하기도 했지만 고려 말에는 왜구들에 의해 사찰이 불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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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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