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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시나요?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18세에 진사가 된 후 참봉과 대사헌 판중추부사도 지냈지만 유학자로서의 신념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낙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영화를 저버린 김집을 보며 현시대 정치인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광산김씨 문경공파 종중(문중)으로 광산김씨는 신라 신무왕의 아들 김흥광을 시조로 조선시대에만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습니다.

 

 

 

크게 번창했던 사계 김장생의 후손은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하였으며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도 그 후손이라고 합니다. 사당답게 이곳을 들어가는 입구는 홍살문으로 되어 있는데 궁전, 관아, 향교, 정려등의 신성한 장소에 설치하여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사강이며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였습니다. 김집의 사후에는 왕명으로 예장하여 연산 동쪽 천호산 고운승사(孤雲僧舍) 북쪽 손향원(巽向原)에 안장되었는데 이때 모인 사람이 거의 천 여명이었는데 이들은 “조정에서는 의심을 풀 방법이 없어졌고, 학자는 종사(宗師)가 없어졌고, 군자는 믿을 곳이 없어졌고, 소인(小人)은 무서워 할 곳이 없어졌다.” 고 합니다.

 

이때에 선생은 이미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능히 큰 글자를 쓰며 경망되게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문원공 노선생(사계 김장생)이 일찍이 말하길, 이 아이가 5~6세에 이미 친구를 따라 놀거나 희롱하는 일이 없었고 손님이 오고 가면 능히 읍양(揖讓)하고 승강(乘降) 할 줄 안다고 했다.  
 
신독재전서 부록 연보

 

 

우측에는 입춘대길 좌측에는 건양다경이라는 글씨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말입니다.

 

 

광산김씨 문경공파 중종은 'ㄱ'자 형태의 기와집으로 일본식 가옥이 살짝 가미된 현대 한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측에는 새로지어진 한옥이 자리하고 있씁니다.

역시 광산김씨 문경공파 중종답습니다.

 

 

저곳이 바로 김집 선생 사당으로 정문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4호(1987년)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5월 12일 김집 선생을 기리며 제향한다고 합니다.

 

 

김집은 효를 다하여 부모를 모시기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9살 때 할아버지으 상을 맞아 김장생이 시묘살이를 하자 김집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좌우로 받들며 예를 다했습니다. 13살때는 어머니의 상을 치루었고 집상하던 중 신병을 얻기도 했다고 합니다.

 

 

귀향과 정계를 오가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김집은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지역 유지라는 이유로 전횡을 부리던 지방의 토호들을 잡아다가 벌을 내리고, 고을의 이방, 아전들이 전횡을 부리지 못하도록 엄격히 단속하였습니다.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후 김집은 아버지의 규범을 준수하여 날마다 관대를 정데하고 새벽에 가묘를 뵈온 다음에 서실에 나가 책상을 대하여 글을 보며 사람 상대하기를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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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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