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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연간에 현감 박곤에 의해 세워진 연산향교는 김집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집(金集, 1574년 음력 6월 6일 ~ 1656년 음력 윤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작가입니다. 계룡에 유명한 고택이 있는 사계 김장생을 아버지로 둔 김집은 선조때 진사로 합격하였습니다. 선조를 거쳐 광해군때 고향으로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활약하다가 김자점이 집권하자 다시 낙향하였습니다.

 

 

 

연산향교의 홍살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배운다면 그 가르침을 이어가야되겠죠. 김집은 송상현의 문화에서 글을 배웠으며 예학(예라는 것은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법칙)에 힘을 썼으며 김장생의 설을 계승하였습니다.

 

연산향교 앞에는 조상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향교는 대부분 마을의 중심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즉 조선조정에서 지원을 받아 지방 수령이 관할하던 공교육기관이죠. 지방 유생이 중앙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향교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중등교육 과정이었습니다. 즉 향교는 지방 공립하교, 서원은 사립학교라고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저곳도 꽤 오래된 건물인것 같은데 관리는 안되고 있습니다.

 

 

유생들이 공부했던 명륜당입니다. 조선 중기까지 조선의 교육기관으로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하다가 조선 후기 들어 서원이 득세하자 유생들이 향교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효종때는 향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 지방 유생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주지 않기도 하면서 공교육기관인 향교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동재입니다. 유생들이 머물던 곳이죠. 주로 양반 자제들이나 고참 유생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를 하고 있더군요. 이런 서재에는 평민 자제들이 머물렀습니다.

 

 

낮은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 연산향교에도 오래된 고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유교문화의 핵심인물인 공자와 4명의 제자들, 제자들의 부모, 그리고 중국 현인들과 우리나라 18명 현인(설총·최치원 등)의 위패를 모시지만 서원은 대부분 크게 출세한 문인을 모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보통 대부분의 향교는 내삼문을 거쳐 이런 제향공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향교와 서원의 공간은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으로 나뉜다. 두 곳은 담으로 엄격히 구분되는데, 특히 사당이 있는 제향공간은 출입이 제한적이었습니다.

 

 

대성전앞에서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바라봅니다.

연산항교는 창건 이후 지방 교육의 활성화와 인재 양성, 성인의 제향이라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을 이곳에 배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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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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