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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조선시대의 교육의 거점으로 사용되던 우리들의 역사공간이며 가르침이 이어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이 포토스팟이 아닐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정도전은 토지의 사유가 마침내 고려의 멸망을 가져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강력한 국영 체제를 가지고 토지를 운영하려고 했습니다.

 

만경향교는 이곳에서 200미터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면 나옵니다.  

상평창이라는 신법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빈곤을 구제하고 겸병을 억제하며 곡물을 비축하여 기근에 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조선 초기 세종시대에는 강력한 국영 체제의 골격이 완성되게 됩니다. 향교의 가르침에도 구휼과 관련된 가르침도 있습니다.  

 


만경읍에는 만경 향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경은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에 속하게 되었고, 동년 3월 2일 만경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 만경읍이 된 곳입니다. 한국사에서 배울 때 1976년은 강화도 조약으로 외우고 있지만 이 해에 가뭄은 극심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 참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과거보다 상당히 진보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은 듯 합니다. 여전히 삶에 미래를 찾기 힘든 사람들도 있고 높은 금리로 백성을 착취하는 채무 지배의 속박으로 농민들이 힘들었듯이 지금도 자본의 지배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제하면 지평선으로 유명할 정도로 들이 넓은 곳이 많은 곳입니다. 그중에서 만경이라는 지역명은  밭 사이의 경계(두둑)가 만 개라는 뜻인데, 이는 곧 ‘들이 넓다’는 뜻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농작지가 넓은 곳입니다.  


앞서 구휼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사람의 삶이 먹고사는 것이 기본이 되고 나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라도는 한반도에서 대표적인 곡창지대이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그중에 김제는 가장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만개의 둑이 있을 정도로 광활한 경작지가 있던 이곳은 조선왕조의 창제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대성전은 깊은 가르침을 주었던 분들을 모시는 사당의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만경향교는 처음에는 동헌(東軒) 서편에 있는 송전리에 설립되었으나 1620년(광해군 12)에 소실되었으며, 1637년(인조 15)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는데 1971년에 동재와 서재를, 1975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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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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