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김해를 대표하는 세 곳의 서원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서원은 구천서원입니다. 봄이라서 그런지 더 화사하고 더 아름다운 공간으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김해에서도 조금 외곽에 자리하고 있어서 김해시내에서는 한참을 올라가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김해 구천서원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조선 말기에 건립된 곳입니다.  1822년(순조 22)에 거인리(지금 외동外洞)에 창건하였으나 습지로 인하여 다음해 왕후릉동편(王后陵東便)에 이건하여 매년(음) 3월 10일에 향례를 하고 있습니다. 

구천서원하면 김해의 역사와도 연결이 깊다고 합니다. 바로 김해를 기반으로 왕국을 만들고 500여년을 이끌어갔던 금관가야 가락국시조왕의 후예인 허경윤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기 때문이죠. 

구천서원에는 봄꽃이 만개해 있는데요. 건물들이 새 것 같아서 찾아보니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98년 유림 및 후손들이 중산(中山)학계를 창설하여 이곳 애춘재(愛春齋)에서 덕행을 기리며 학맥을 이어오다 1996년(병자)에 서원복원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구천서원 옆으로는 산책로도 조성이 되어 있으니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봄향기를 맡으면서 주변을 걸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김해 구천서원은 맵에서도 잘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열심히 잘 찾아보니 주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서원이나 향교등을 보면 외삼문이 있고 내삼문이 있는데요. 그 차이는 바로 1,000년이 넘는 시기의 인물을 모신 곳은 내삼문을 만든다고 합니다. 즉 그만큼 역사와 유래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柴扉尨亂吠 사립문의 삽살개 요란스레 짖는다
窓外白雲迷 창밖에 흰 구름 떠도는 것 보고...
石徑人誰至 돌길 이어진 여기 누가 찾아오리
春林鳥自啼 봄 숲에는 새들만 지저귀는데...

 

이곳에 모셔진 인물 허경윤의 한시입니다. 

실제로 죽암은 선조가 직접 주관한 과거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정승 이원익이 여러 차례 관직을 제시했을 때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돌길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산속 집은 세상의 번잡함과 권력 다툼에서 벗어난 자연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외적 침입에는 분연히 궐기하여 일어났습니다. 

학문을 했으며 정성을 다해 제자들을 길러냈지만 나라의 운명에는 온몸을 던져 신념을 지키는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4월 14일 부산진성, 4월 15일 동래성을 무너뜨린 일본군은 17일 김해로 밀려왔는데요. 당시 김해읍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전멸을 하고 수로왕릉까지 파헤쳤다고 하네요. 그 소식을 듣고 100여 명 장정을 급히 조직한 허경윤은 바로 수로왕릉으로 달려갔다. 그저 헛소문일 뿐 수로왕릉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었지만, 왕릉과 왕비릉은 처참하게 파헤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적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한밤을 이용, 장정들과 함께 능의 봉분을 다시 본래 모습대로 회복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홀로 산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허경윤은 결코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1822년, 온 나라의 선비 221명이 뜻을 모아 김해부 서쪽 거인리(현 내외동)에 구천서원(龜川書院)을 세운 것입니다. 

허경윤이 분연히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원래의 김해읍성은 본래 전체 길이가 1950m, 동문 해동문(海東門), 서문 해서문(海西門), 남문 진남문(鎭南門), 북문 공진문(拱辰門)으로 구성된 곳이었습니다. 

죽암 허경윤은 조식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죽암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란 중 불타버린 산해정(山海亭, 조식이 제자들을 기른 강학 장소,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25호)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선 것도 군자다운 올바른 행동이었습니다.

 

김해 구천서원

김해시 상동면 상동로 274-12

728x90
반응형
Posted by 느린세상걷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