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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아직도 베지 않은 곳도 있는데요. 황금색의 벼가 익어가는 계절에 야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의외의 흔적을 만나게 되더라구요. 아산에 김옥균과 관련된 묘와 흔적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요. 공주에도 김옥균이 살았던 집의 흔적인 유허지가 있었습니다. 



저도 매일 밥을 한 끼는 먹지만 쌀을 보면 가끔 종류를 생각하곤 합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게 재배되고 있는 것은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라고 하는데요. 이 오리자 사티바는 일본형·인도형·자바형의 3형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자바형은 인도형에 가까우므로 일본형과 인도형의 2형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재배되는 것은 일본형이죠. 



얼마전 KBS역사를 다룬 프로에서 본적이 있는데요. 지금은 일본을 선택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때 급진개화파의 지도자로 김옥균이 개화 사상을 추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주거의 흔적은 거의 없어졌지만 김옥균의 유허로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당초에 온건 개혁 노선을 추진했지만 민씨 일파의 반대에 부딪히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김옥균 유허를 알리는 비를 지탱하고 있는 거북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김옥균은 충남 공주에서 몰락한 양반 김병태(金炳台)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개화에 대한 많은 교육을 받고 갑신정변을 한 김옥균이 추진한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단절하고 내각의 권한을 확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다. 둘째, 경제적으로는 지주자본을 이용하여 농·상공업을 육성하고, 국력을 진흥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한다. 셋째, 사회면에서 문벌·신분제의 폐지를 통한 만민평등을 지향한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는 고김옥균선생유허비입니다. 3일만에 끝난 큰 변동은 개혁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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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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