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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의 대표운동가인 백봉 나용균은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식민지국가의 독립분위기에 따라 동경에서 백관수(白寬洙) · 김도연(金度演) 등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 일대의 한국인 유학생을 동원하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독립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성장기의 정치인들과 지금의 정치인들의 지향 목적이 다르다고 합니다.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왜 그런 삶을 사는지에 대한 목적하는 바가 다르다고 합니다. 


정읍에 가면 본관이 나주인 나용균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와세다대학에 유학까지 할 정도로 집안도 풍족하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던 사람입니다. 



유년기에 성장했던 백봉 나용균 생가는 10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태어났던 생가의 원형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당대에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해외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나용균은 광복 이후에 정치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손들이 살았기에 지붕의 구조를 보면 광복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눈에 뜨입니다. 정읍 나용균 생가(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164-1·소유자 나영호외 2명)는 사랑채·문간채·고방 등 3동(1층)으로 이뤄져 있고 지난 189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명 자유당 때에 야당의 후보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정읍군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처음 정치에 발을 디뎠다고 합니다.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정읍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창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습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정읍군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김창수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습니다. 

 

나용균 생가의 현재 안채는 주초석 일부만이 남아 있고 사랑채, 문간채, 고방이 보존되어 있으며 생가 가까운 곳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당은 문학마을 어귀에 자리하고 있으며 솟을대문을 세우고 대지 경계에는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장을 쳤습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데 그 성향에 맞는 직업이 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삶의 선택은 다른 사람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정치인의 삶을 살면서 대통령선거에도 나갔으며 국회부의장도 역임했던 나용균은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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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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