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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는 다양한 역사적인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홍주성천년 여행길이라고 해서 홍주의사총과 홍주의병기념탑, 홍주향교등을 걷는 길을 따라서 걷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홍주성에는 성지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생매장했던 터에 대한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홍주성 천년길을 걸어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을 지켜오며 그 찬란한 천년 역사를 품에 안고 있는 내포의 큰 고을이 홍성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강한 일본에 붙어서 이득이나 각종 특혜를 누리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곳곳에서는 자국의 땅을 지키겠다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았습니다.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즉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말할 수 있는 발언권자체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반대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다섯 명은 조약 체결에 동의했습니다.


오래전 천변이 흐르는 이곳에는 수백 명의 시체가 산재해 있었다고 합니다.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유골들은 1949년에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 유골들은 수백 명의 희생된 의병 전사자임을 알고 묘소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전사가 된 의병들의 시신을 모셨던 곳에는 사당인 창의사에 900 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서 구백의총이라고 했었는데 이를 1993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충청남도 내포지역에서도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홍성지방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1906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여 홍주성을 함락시켰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대부분의 의병이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홍주의사총은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창의사에서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을미의병으로부터 연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호국의 달인 6월에 홍주의사총으로 다가가 봅니다. 홍주의사총의 묘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묘의 오른쪽에는 정인보가 짓고 심상직이 쓴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에 근대 일본화의 주역이기도 했으며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 그 후에 등장하게 됩니다. 1906년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통감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에 각국 주재 한국 공사를 철수시키고, 한국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도 이듬해 철수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역사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주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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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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