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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변에 자리한 고마나루의 전설은 백제시대 때부터 내려왔다. 고마나루의 전설은 곰나루 북쪽에 솟아 있는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의 곰이 살았다는 동굴이 곰나루를 내려보며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곰의 전설에서 시작된 백제때부터 시작된 제사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서독, 조선시대에는 남독으로 숭배되어 오다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제사의식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야외를 나가면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무덥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녁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더위를 체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안쪽으로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고마나루 솔밭길이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해가 저문시간이어서 그런지 걸어서 돌아보기에 그렇게 덥지는 않았습니다.  

공주에서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은 한강유역의 위례성 다음으로 백제인들이 이곳에서 머무를때로 돌아가는 여행입니다.  

화장실과 음수대가 있고 곰사당, 전망대로 걸어서 갈 수 있고 더 올라가게 되면 공주보까지 걸어가볼 수 있게 길이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 이어지는 나지막한 산은 연미산(燕尾山)이 있으며  지척에 가로 서 있는 공주보로 인해 강은 호수처럼 잔잔합니다. 웅진단(熊津檀) 터를 알리는 비석이 공주에 있는데요. 이곳에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주관으로 제사가 행해졌었습니다. 처음에는 곰에 대한 제사였으나 점차 수신(水神)에 대한 제사로 성격이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1945년에는 큰 장마가 져서 고마나루 일대의 모래가 쓸려 나갔는데, 그 자리에 가로 세로로 쌓은 건물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난 적도 있다고 하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고마나루는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번화가였다고 하는데 현재에는 그 모습은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만화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곰나무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인간인 남자를 붙잡아 새끼 두 마리를 낳고 살았으나 남자가 몰래 강을 건너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에 어미곰은 자신의 남자를 잃어버린 것에 실망하여 새끼 두 마리와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후 금강은 건너기 힘들 만큼 비가 쏟아지고 조용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금강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곰사당은 조선 시대 향교의 대성전을 본떠 지었다고 합니다. 정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렸고 현판에는 웅신단이라 쓰여 있습니다. 

저 앞에서 1972년 곰사당이 있던 자리에서 화강암으로 된 높이 34㎝, 폭 29㎝의 돌 곰상이 발견되면서 고마나루의 전설이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곰사당은 시간이 흐르면서 웅진 연소, 웅진사, 운진 신사, 웅진단으로도 불려 왔다고 합니다. 

그늘이 짙어도 길가의 숲이란 빛이 드나들기 좋아서 잡풀이 왕성한 계절입니다. 이편의 솔숲 너머에는 금강이 흐르고 저편의 솔숲 너머에는 백제큰길이라 부르는 도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000년의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일까요 천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고마나루에 남아 있는 백제의 숨결은 오늘날 공주 지역이 웅진 백제의 중심부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고마나루로 옮겨 도읍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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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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