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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사는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지만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을 자신의 잣대로 규정지을 수는 없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대로 사는 것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살아간 사람의 발걸음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은 예산에 자리한 도중도라는 곳입니다. 윤봉길의사가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가 살았을 때 가족이 사용했던 물건과 생각들이 살아 숨쉬는 공간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윤봉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민족을 위해 사용했으며 그 시간의 중요성도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가재도구들입니다. 농촌에서의 교육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일제강점기에 그 방법은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방해가 끝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고향에서 문맹퇴치 운동 등 농민운동을 계속하던 윤봉길은 1929년 봄에 학예회를 열어 이솝우화인 '토기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공연은 헐벗고 굶주리는 일제 강점기 하의 농촌 실태와 잔혹한 일제의 통치를 풍자했다고 합니다.  

본관은 파평,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이며 몰락한 예산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1918년 덕산공립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한 매헌 윤봉길은 한글·역사·산술·과학·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습니다. 

발길을 옮겨서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 발길을 했습니다.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 기념식에서 물통 폭탄을 단상에 던져 일본의 군부와 관부 인사들을 사상시켰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사형당했던 그 기록이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윤봉길이 김구를 만나서 어떤 생각과 의견을 교류했을까요. 김구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변화는 일어나게 됩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거사는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는데 임시정부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후원 아래 항일 연합전선을 펼쳐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합니다. 

제가 돌아본 윤봉길 의사기념관의 주된 컨셉은 시계와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시간이 있는데요.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상해에 폭탄을 터트린 윤봉길에게는 공소제기가 되었는데 경성 지방검찰청에서 공소장을 만들었으며 상대 일본군 군법회의 예심에서 작성된 44면에 달하는 상세한 신문조서에는 그가 어떻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좋은 기억들이 남아 있는데요. 윤봉길 역시 그런 기억이 있을겁니다. 그의 생애를 이야기와 그림, 영상, 기록물로 이곳에 남겨져 있습니다.  


윤봉길을 상징하기도 하는 '매헌'이라는 호는 스승인 성주록 선생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세상에 나가 더 깊은 공부를 하라'며 자신의 호인 매곡(梅谷)과 평소 윤봉길의사가 존경하던 성삼문의 호 매죽헌(梅竹軒)을 따서 오치서숙 수료 선물로 지어 준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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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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