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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상을 무언가 정의롭고 정당하지 않은 것에 분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국제사회에서는 힘의 논리가 앞선다고 합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로 그 시기를 겪으면서 경험하기도 했었습니다.

2022년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게 침공을 당했지만 미국이나 나토에서 경제봉쇄와 더불어 군수품 지원 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 국제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요. 일제강점기로 들어간 이후에 조선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은 동양 변방의 식민지에 불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했고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화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지고 나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1919년에 삼일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서명하는데 참여했던 사람 중에 김복한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을미년 의병대장이었던 김복한 선생 유적지인 추양사로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169호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1892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서 교리, 양사, 사서, 통정, 대사성, 형조참의를 거쳐 2년 만에 승지에까지 제수된 김복한은 일본의 영향이 미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조정에서 나와 충남 홍주로 내려왔다가 을미 홍주의병과 관련되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파리강화회의는 독일등의 패망국에 대해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자리였습니다. 

 

추양사가 건립된 시기는 1975년으로 김복한 선생을 존경하던 사람들이 발의하여 당시 홍성군수 조영호가 300만 원을 들여 추양사를 준공했고 이어 부임한 이관현 홍성군수가 군비 500만 원을 투입해 저와사업에 착수하여 논과 밭, 산을 매수해 사역을 확대했다고 합니다. 

넓게 봐서 국가 간의 분쟁이나 지역 간이나 더 좁게 봐서 조직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힘의 논리가 작용을 합니다. 힘이 없으면 발언권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정의라는 것이 어느 잣대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서명했던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고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순국하게 됩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처단을 상소하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던 김복한 선생은 모진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는데 사후 1963년에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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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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