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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로 모두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런 때일수록 잊혀져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하늘이 변화하는 것처럼 삶도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세운 기준이나 일관성은 계속 유지하는 것이 변화에 잘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그때 다르게 살았던 것입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삶의 일관성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권을 잃거나 위기에 빠진 국가의 국민 중에서 자신의 인생을 국가의 독립 회복과 발전을 위해 바치는 인물을 지칭하는 애국지사의 이야기가 청양에는 많이 있습니다.

 

 

 

 

삶이 예측하지 못하게 될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며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조금 더 편하게 혹은 더 잘살기 위해 살다 보면 변화를 놓치게 된다고 합니다. 굳이 주변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다가 삶의 기준이며 선택의 기준이 탐욕이며 자신의 편익이라면 그것은 분명한 배신입니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민족을 향해 배신을 했던 사람들이죠. 


 

청양에는 면암 최익현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애국지사나 독립운동가였던 사람들의 흔적이나 묘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면담 최익현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자신의 신념대로 활동했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애국지사라는 이세영 유적지의 이정표를 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정표를 보고 안으로 들어오면 쉽게 찾기 힘들지만 잘 살펴보면서 다니다 보면 유적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이 그곳이라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곳은 충남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 갓 고개로 독립운동가(1869~1938)는 한말 의병운동부터 삼일운동, 임시정부 수립까지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고 합니다.

 

 

 

일제 침략에 항거해서 을미와 병오 홍주의병에서 민종식 의병장 등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1908년에 형 집행 중지로 풀려난 후 이곳에 성명학교를 설립했었다고 합니다. 

 

이세영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을 하기도 했었던 사람입니다.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의 '흥'자를 붙여 신흥강습소를 조직했는데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 무관학교로 개칭했고 1920년 폐교 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합니다.

 

 

최근 유해가 송환된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도 신흥 무관학교 출신들이 많이 참여를 했다고 합니다. 신팔균,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교관을 맡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의열단 단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원봉도 신흥 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이세영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관현리에서 내려서 가면 됩니다. 

 

 

 

애국지사인 이세영의 흔적을 찾아보고 가는 길에 독립유공자인 이덕현 묘소와 우현덕 묘소의 이정표도 잠시 멈춰서 보았습니다. 묘지가 있는 이곳은 마을 입구에 서낭고개가 있고 고개 밑 굴에서 옥이 채굴되어 옥현(구서ㅡㄹ고개)의 지명이 되었고 일제의 탄압속에 독립을 갈망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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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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