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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많은 사람들이 죽고 국토의 상당부분이 왜군에 의해 침략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겨져 있는 곳이 적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의병들과 장군들도 있었습니다. 김제에도 그런 사람중 한 명인 안위장군의 묘가 남겨져 있습니다. 

 

안위장군묘로 지나가는 길에서 벽골제마을이라는 이정표를 보았습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저곳에서 잠을 자면서 여러가지 체험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아쉽네요. 

 

여름이라서 수풀이 우거져서 안위장군 묘 이정표를 보지 못하고 지나칠뻔했습니다. 

 

가까이 왔는데도 안위장군의 묘는 여전히 많이 가려져 있어서 잘 보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대훈(大勳). 정여립(鄭汝立)의 5촌 조카인 안위는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때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이순신의 함대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명량에서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제외하고는 12척의 배 모두 뒤로 빠져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후 이순신의 대장선 1척으로 일본을 상대로 분투하던 중 초요기를 올려 다른 함선을 부를 때 가장 먼저 이순신을 도우러 왔던 안위가 저 앞에 잠들어 있습니다. 

차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조금더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야 안위장군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1605년 충청수사로 재기용되고 이듬해 경상좌수사, 1612년(광해군 4) 포도가대장(捕盜假大將: 임시 포도대장)이 되었던 안위는 현재 김제의 학당사에 제향 되어 있습니다.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어란포(於蘭浦)를 출발한 왜선 133척을 맞아 12척의 병선으로 필사의 전투를 벌여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러나게 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오늘날 명량대첩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명량대첩에 안위장군이 참여를 했습니다.   


1563년 전라도 김제군(현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에서 태어난 안위는 정여립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김제 금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서 기억이 납니다. 정여립은 전주의 문벌이 좋은 집안의 아들로 그는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으며 촉망받는 선비였습니다. 

안위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접해볼 수 있습니다. 위기가 기회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맞는 말이지 않을까요.  안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한 안위 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종하기 위해 지금의 논산지역인 은진에 머물다가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보내다가 1644년(인조 22년) 향년 8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별장이 있는 금구로 집을 옮기고,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학문을 익히며 여러 사람과 어울렸던 정여립은 정치적인 희생양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안위는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한 전공이 이순신의 장계 덕분에 널리 알려져 선조 31년(1598)에 전라 우수사로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600년에는 전라병사에 제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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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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