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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하면 윤봉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도중도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도 자리하고 있죠. 다음달이 8월이니 의미가 있는 공간입니다. 예산의 인물 윤봉길 의사의 상이 막바지 공사중이라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윤봉길 의사하면 '도시락 폭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만 윤 의사가 실제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 등을 향해 던진 것은 도시락 형태의 폭탄이 아니라 '물통형 폭탄'이라고 합니다. 

저는 윤봉길의사의 행적중 폭탄을 던진것보다 지역에서 사람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곳에서 도중도는 멀지가 않은데요. 광현당(光顯堂)은 ‘빛이 나타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집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김구와 함께 직은 사진과 태극기앞의 그의 모습이 당당해 보입니다. 

이곳에는 윤봉길 의사의 행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사업회가 디지털화해 소장한 윤 의사 판결문(1932년 5월25일자 일본 상하이파견군군법회의 판결문)에는 "손에 들었던 도시락형 수류탄을 땅에 두고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형 수류탄을 벗어 그 발화용 끈을 당기는 동시에 단상 근처로 돌진해 단상 좌측 후방으로부터 단상을 겨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윤봉길이 일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걸었으나 광복의 그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한 후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식장에 던져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에 이르렀으며 그 과정이 사진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윤봉길은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학생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라는 그의 말이 가슴에 새겨집니다. 자유와 독립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날에 그 분위기를 안고 집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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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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