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옛날에 회덕이라고 불리웠던 대전에는 적지 않은 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하여 동춘당공원의 송준길과 권시, 유회당 권이진등 조선시대 유학을 이끌던 사람들입니다. 서구에는 송준길이 임금에게 “시는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니 버릴 수 없다.”고 주청하여 한성부좌윤에 임명을 요청했으나 스스로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공주(현 대전)의 옛 집에 돌아갔던 권시의 묘가 있습니다. 

 

서구의 안쪽으로 들어오면 권시를 모신 도산서원을 지나치면 권시의 묘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볼 수 있습니다.  

권시는 자신의 소신이 있다면 그것을 지킬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립하여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낙향하던 중 광주(廣州)의 선영에 머물러 살았다고 합니다. 

 

권시는 안동권씨로 안동권씨는 개국에 많은 공을 세운 것을 치하하며 고려 태조 왕건이 내려준 것이기도 합니다. 

 

이 건물은 만회집과 탄옹문집 판목이 보관된 곳으로 탄옹문집 판목은 권득기의 아들인 탄옹 권시의 글을 모아 1738년(영조14)에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위쪽으로 올라오면 양지바른 곳에 권시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능력이 잇어 1636년(인조 14)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세자시강원자의 등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강직했던 권이진의 아버지는 현감 권유(權惟), 어머니는 산림(山林) 송시열(宋時烈)의 딸이며 논산 명재고택의 윤증에게 배웠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우윤(右尹) 권시(權諰)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참 관리가 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시, 권유, 권이진으로 이어지는 것으로만 보아도 집안의 교육철학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식이 주체로 올바르게 자립한 다음에야 모든 배움은 의미가 있으며 옳게 쓰일 수 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행(志行)이 절이(絶異)하여 사람들이 안자(顔子)에 비유하였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좌참찬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으며 예론에 밝았던 권시가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느린세상걷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