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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정호는 주변으로 역사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가 있어서 재미있는 여행지이기도 합니다. 그중에 조정서원이라는 곳은 왕실인물의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조선 태조의 아들이었던 이방원은 자신의 왕위에 위협이 되는 형제를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때 제거해버리게 됩니다. 그 화에서 벗어난 사람 중 방의(芳毅)가 있었습니다. 

방의의 아버지는 이성계이며 형은 정종이며 동생은 태종입니다. 그는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때 모두 방원 편에 서서 화를 피했을 뿐이 아니라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었으며  좌명공신 2등에 책록 되며 익안대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논산시 가야곡면 등길 129에 있는 조정서원은 익안대군의 증손자인 이현동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곳이라고 합니다.    

옛 인물의 이야기는 사실도 있지만 야사같은 이야기도 있어서 번갈아 살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형제의 난으로 인해 피바람이 크게 두 번 불었습니다. 개국시기에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과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 바로 그것입니다. 


익안대군의 증손자인 이현동은 단종이 수양대군의 압박에 못 이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이현동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단종은 왕위를 내주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농맹아라고 칭하고 일생을 통곡 속에서 생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살았다고 합니다. 

 


한 세대가 보통 30년으로 계산하니 1차 왕자의 난(1398)과 계유정난(1453)의 차이는 55년이 두 세대쯤 지나갔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환골탈태는 결국 스스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자주 살펴보는 것도 환골탈태를 위해 필요한 것이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사용되었던 환골탈태를 사람에게 적용하면 마치 전에 없었던 모습으로 바뀐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사람이 환골탈태하는 것은 뼈를 바꾸고 태를 빼내는 것이니만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란은 남이 깨면 간단한 요리 재료로 한 번만 사용되지만 스스로 깨면 병아리가 되어 닭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신라군의 진격 경로의 황산 벌판으로 계백은 5천의 결사대와 함께 나아가게 됩니다.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조밀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면 시간을 조금 더 끌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유효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탑정호 소풍길은 한 해가 갈수록 더욱더 알차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탑정호에는 언제 광장이 생겼는지 탑정호를 지탱하는 댐 위에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논산의 혼이며 정신이라는 계백장군의 실루엣과 함께 말입니다. 계백이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10배의 적을 막기 위해 황산벌로 나온 것에 대해 무모하다고 생각하지만 계백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군은 전통적으로 성을 하나씩 점령하면서 전쟁하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고 전격전으로 부여로 향했다고 합니다. 소수로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성에서의 방어전을 하려고 한다면 신라군은 그냥 지나칠 것이 뻔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논산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황산벌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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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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