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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학교 다닐때 역사책에서 사간원과 사헌부를 배워본 적이 있지만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사간원은 상당히 중요한 관청이었다고 합니다.  최근의 일련의 사회적인 이슈로 인해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소양서원은 열린 공간이어서 저에게는 마음이 편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권력자의  언행이나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으로서의 역할과 일반 정치에 대한 언론으로 논박의 대상은 그릇된 정치일 수도 있고 부당, 부적한 인사를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헌부의 관원인 대관(臺官)과 병칭 해 대간(臺諫)이라 합니다. 너른 공간에 자리한 서원이지만 옛 고건축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는 곳입니다.  

 


왕권의 탄압을 받아 그 기능을 상실한 때도 있었으며 사간원은 권력이나 당파에 이용되어 폐단이 생기기도 했지만  의정부·육조·사헌부 등과 더불어 정치의 핵심 기관으로서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이나 신권(臣權)의 독주를 막고 균형 있는 정치를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던 기관입니다.  

문경의 잉카. 마야 박물관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소양 서원은 숙종 38년(1712년) 처음 설립되었으며 서원의 일반적인 형태인 강학과 제향 공간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고종 8년(1871) 서원 훼철 당시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존치되었으며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었습니다. 소양 서원은 나암 정언신, 민백당 김낙춘, 고산 남영, 가은 심대부 및 가은 이심 등 모두 5인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소양서원의 대표인물인 나암 정언신은 바로 그 사간원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핵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지만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았다가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고 합니다.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 후 복원되어 이곳에 제향 되었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언론의 역할은 여러 번 언급해도 부족할 만큼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간원은 간쟁, 탄핵, 시정, 인사 등에 언론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언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상적인 유교 정치의 구현에 있었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일컬어 ‘언론 양사(言論兩司)’라고 하였습니다.  간관의 자격은 당해원(當該員)과 그 내외 사조(內外四祖)에 흠이 없어야 됨은 물론이고, 강개(慷慨)한 언론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고 합니다. 지금보다 더 철저한 기준에 의해 인물이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소양 서원의 동쪽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한류정(暵流亭)과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의 존승재(尊承齋)가 별도의 일곽을 이루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소양서원은 2006년 6월 1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언신은 모함을 받았던 사람이었지만 또 다른 인물로 소양 서원에 모셔진 심대부는 사간으로서 유계(兪棨) 등과 조(祖) 자의 묘호를 반대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 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 해에 죽고 사후 신원되어 소양 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이곳을 유교테마파크로 조성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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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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