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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광복이후에 대한민국은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혼란의 시대에 정치인이나 지도층은 많은 책임과 그 속에서 갈길을 찾아야 했다고 합니다.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는 문중의 고증을 복원한 곳이 천안에 있었습니다. 격동의 시기에 정치인이였던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아담한 초가집과 행남채 건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어서 조용하게 한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조병옥박사의 생가가 있는 곳 앞에는 너른 논이 펼쳐져 있더라구요. 조병옥박사의 집안도 상당히 부자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조병옥박사는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1914년에 연희 전문학교를 마쳤으며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이후에 일본에 맞서기 위한 조직 신간회를 창립했다고 합니다. 





조병옥박사의 생가 앞에는 주차장도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천안답게 조병옥박사 역시 1929년 광주학생 항일 운동을 뒤에서 지지하다가 일본군에 잡혀가 감옥살이라는 하기도 하는등 적지 일제시대에 적지 않은 감옥살이를 경험합니다. ​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다' 조병옥박사의 어록입니다. 우리는 흔히 작은 잘못을 덮기 위해 좋은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트릴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진 몇몇을 골라내기 위해 무슨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당시 조병옥 박사의 부모님은 모든 교육을 다 시키고 미국까지 유학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교육이 사람을 바꾸고 큰 생각을 가지게 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친일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과 정치적인 중립성 그리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 알았던 사람의 생가입니다. 



소박해보이는 생가의 안쪽으로 들어가 봅니다. 당시에도 엘리트 코스라고 불릴만한 교육과정을 거쳤던 조병욱 박사는 경제학을 전공하였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해방 정국에는 경찰 총수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면서 지금은 폭동이 아닌 제주사람들의 희생사건으로 알려진 4.3사건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격변기인 1960년 한국 제4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유세 중에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급서하였습니다.  






조병옥 박사는 후에 자서전 '나의 회고록'에서 부친에 대해 "만약 내 아버지가 나 정도의 학문이 있었다면 위대한 정치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병옥 박사는 한양조씨 충정공파 24세손으로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과 태종 때 찬성사를 지낸 조온 등 조선의 개국공신을 2명이나 배출하기도 했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조병옥박사의 생가의 한쪽 건물은 창고와 농사도구를 보관하는 헛간이 있는데 눈에 띄이는 것이 바로 통나무로 만든 여물통이 놓여져 있습니다. 







광복 이후에 조병옥 박사는 한국 민주당을 창당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외교적 활동도 전념합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장관으로도 일했으나 정치적인 노선의 차이로 인해 사퇴하고 이후 정치인의 삶을 영위하면서 반독재 투쟁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부친이 미국여비로 3000원을 마련해줬는데, 이는 우리집 재산인 땅 120두락(마지기) 중 절반을 판 돈"이라고 할정도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의미있는지 알았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급서한 조병옥박사는 미국 유항 당시 한인회, 흥사단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한 공으로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에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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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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