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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의지가 넘어서 공동의 의지가 되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꿈은 다르지만 모두가 원하는 것들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의지일 것입니다.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고 들어본 적은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사발통문은 어떤 격문이나 호소문을 쓸 때 주모자인가를 알지 못하도록,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둥글게 뺑 돌려 가며 적은 통문이 사발통문이라고 합니다. 

 

 

 ‘탐관오리’ 조병갑(1844~1912)의 학정에 시름 하던 민초들이 전라도 고부군 서부면 신중리 대뫼(竹山) 마을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한다’고 결의한 것은 계사년 11월(1893년 12월 초~1894년 1월 초)이었습니다.  

 

사발통문은 사실 동학 농민운동 때에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가 있는데 그만큼 대중의 힘을 활용했다는 대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모의 장소 사발통문작성의 집을 중심으로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과 동학혁명 모의탑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평면 덕천면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연결해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 샘솟길’이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전봉준을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인은 1893년 11월 이 마을 송두호 집에 모여 사발통문(누가 주모자인지 알지 못하도록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돌려 적은 통문)을 작성하고 거사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전봉준은 장터 언덕배기 감나무 아래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을 설명하고 이에 맞서 봉기할 것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반부패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전주감영에서 파견한 관군을 크게 이긴 최초의 전승지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됐습니다.

 


동학혁명에서부터 3·1 독립만세운동, 4·19 혁명, 1979년 부마민주화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꾸었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행보는 조선 정부를 놀라게 했습니다. 민 씨 척족이 가장 신뢰하는 무장 홍계훈(?~1895)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해 서울을 지키던 최정예 부대 경 군(京軍) 800명으로 동학군을 진압하게 했지만 기세가 오른 동학군은 부안(8일)을 습격한 뒤 10~11일 황토현(정읍)에서 관군인 전라감영군(지방 군)을 격파했습니다. 외국군대의 힘을 빌리자고 홍계훈이 주장하자 결국 일본이 조선땅에 들어오게 될 빌미만 주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홍보관을 겸하고 있는 마을회관 앞에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 아래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무명 농민군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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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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