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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입한재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다가 구봉 송익필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송익필은 중종 29년인 153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신분의 한계로 인해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독학으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년에는 아버지 송사련이 무고했다는 무오사화로 인해 피신해 당진지역에 숨어 살다가 1599년 6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과거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부모가 선택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학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구봉 송익필이라는 사람은 당진에 묘소가 있었습니다. 그 묘소의 앞에는 그를 주향으로 하는 입한재라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논산시에는 휴정서원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그곳에서는 송익필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매년 음력 3월과 9월 20일에 향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인 1720년 (숙종46)에 김장생의 후손인 김진옥이 묘표를 세우고 병계 윤봉구가 묘소 앞에 제각 입한제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곳은 당진시 향토문화유적 제5호입니다. 

 

구봉 송익필은 뛰어난 문장가이며 유학에도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서얼이라는 출신으로 인해 관직에 나갈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신흠이라는 사람은 그를 일컬어 천품이 매우 높고 문장 또한 높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낯선 사람입니다.

 

율곡 이익, 우계 성혼, 송강 정철에게 그 학식을 높이 인정받았으며 논산의 돈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사계 김장생의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출신성분과 그의 아버지인 송사련은 안당가를 무고한 신사무옥으로 인해 영원히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숨은 골의 은거지에서 숨어 살다 시피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예학의 종사라고 일컬어질 만큼 수준에 이르렀고 이어 사계 김장생에게 이어진 다음 아들 김집 그리고 김장생과 김집을 흠모하던 우암 송시열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입한재의 입구에는 구봉선생을 모신다는 공간을 알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입한재에서 옆으로 보면 구봉 송익필의 묘가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묘갈문에서 '선생은 과거 이외에도 마음을 둘 곳이 있음을 알고 마침내 성리의 모든 서적을 가져다가 낮과 밤으로 강론하고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도 낱낱이 이해하고 얼음이 녹듯이 해소하였다'고 썼습니다.  

지금도 구봉 송익필이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 숨어 살았던데서 유래한 숨어골(숨은골, 수머골)이란 마을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한자를 잘은 모르지만 그의 노력과 재능이 보이는 글이라는 느낌은 듭니다.  구봉 송익필의 시는 성당시를 따랐다고 합니다. 성당시는 당 현종 개원 원년(713)에서 숙종 상원 2년(761)까지 약 48년간에 걸쳐 당나라 최고번성기와 전란을 함께 겪던 시기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애절한 사연이 있을 때 그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인가요.   이곳은 충남 당진시 원당동 147에 자리한 조선 최고의 도인이라는 구봉 송익필의 묘와 사당인 입한재가 있는 곳이며 그 아래에는 송익필에 대한 설명과 송익필이 썼다는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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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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