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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어찌 이리 어둡고 차기만 한가(天地何晦寒)
지사가 의리를 펴지 못하네(志士未申義)
후면에는 공자의 위패가 있고(後有文宣宮)
앞면에는 선생들의 위패가 있는데(前有先生殿)
뒤를 보아도 부끄러운 일 없고(後瞻無所愧)
앞을 보아도 저버린 일 없구나(前瞻無所負)
부자가 함께 옥에 있으니(父子同就獄)
도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리라(還爲世人笑)

 

흰 눈이 내린 독립의사들의 공간인 이곳에 어울리는 한시가 아닐 수가 없는데요. 바로 안창식선생이 한탄속에 지은 시라고 합니다. 

 

의병을 일으켰던 안창식은 홍주관찰부에 압송되어 관찰사 이승우의 문초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승우가 처음 창의한 뜻을 뒤집고 동지들을 배반한 것을 힐책했다고 합니다. 

이후 12월 26일 경무관 강호선의 문초를 받았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곤전(坤殿: 왕비를 달리 이르는 말)'이 역적의 무리에게 시해당한 일과 임금의 상투가 강제로 잘리는 변을 보고 창의했음을 분명히 밝혔다고 합니다.

경무청에서 고문을 당했던 안창식, 안병찬 부자가 상면할 수 있었는데 안병찬은 수건으로 목을 싸고 있었으며, 채 아물지 못하여 뼈가 드러나고 살은 비틀리고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다고 한다. 안창식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부자가 다 극형을 받는다면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약에 선택 구분이 있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다."   



눈이 정말 많이 내리긴 내렸습니다. 이곳까지 들어오는 길이 참 많이 미끄럽습니다. 

안병찬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을 주도한 여파로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고종에 의해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1906년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의 참모로 활약하여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의거가 있자 변호사 자격으로 변호를 담당하기 위해 여순(旅順) 법정으로 갔지만 일제는 관선변호인만 인정하고 안병찬의 변호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양에서 보령까지 선형이 좋은 국도가 뚫리고 나서 옛길로는 잘 안 가게 됩니다. 전에는 지나치면서 보았던 것도 지금은 접근성이 좋지 않아서 지나치게 됩니다. 오래간만에 부자가 같이 독립운동을 했었던 흔적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는 곳이라서 내리는 눈은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안창식 선생이  두 아들 병찬, 병림과 함께 1895년 을미의병에 투신한 것을 기리고 있는 곳입니다. 

안병찬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 법부(法部) 주사로 을사오적을 죽일 것과 나라를 바로잡을 것을 국왕에게 상소했으나 오히려 경찰에 구속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창식 선생의 둘째 아들이었던 안병림 선생은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 및 돌격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안항식 선생은 1906년 4월 25일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로 활약하여 일제에게 체포된 후 대마도로 후송 감금되었다가 4년 만에 귀국하였습니다.  

 

안창식, 안병찬, 안병림 선생은 청양을 기반으로 유생들과의 연대를 하면서 일제에 저항하고 의병도 일으키면서 많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래도 이런 분들이 있어서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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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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