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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청산리 대첩이 있는지 100년이 지났지만 오랜 시간 자연스러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노출되지 못했던 한반도는 오랜 시간 왜곡된 역사와 질서를 받아들여야 했었습니다. 

조선시대가 아닌 근대식 군대조직의 시작은 문경의 이강년이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올해는 일본은 통쾌하게 이긴 한해이기 때문에 청산리전투의 의미가 더욱 뜻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게 됩니다. 현대식 전쟁에서의 전술은 독일에서 지속적인 혁신으로 촉발되었습니다. 독일 몰트케의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는 위대한 위험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과감한 원칙에 따라 산업시대의 전술은 발전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지는데 프로이센을 승리로 이끈 최고의 전쟁계획이었으며 유럽 전역의 모든 국가들이 프로이센 모델을 모방하게 됩니다.  일본도 이 모델을 받아들이게 되죠. 



올해는 일본강점기에 싸워서 통쾌하게 이긴 전투였던 청산리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로 10월 26일이 100주년이니 1주일이 남아 있습니다.

 

 

 

1920년 청산리대첩이 일어나기전 1914년 무렵 모든 주요 전투 당사국들은 전투 양상을 바꿔놓은 연발총, 기관총, 속사포, 철도, 전신 등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역시 동학농민운동과 국내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압도적인 화력을 사용하였습니다. 

 

 


청산리대첩에서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김훈(金勳)·백종렬(白鍾烈)·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등 수많은 군인들이 참가해서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대한독립을 향해 걸어갔던 사람들과 김좌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한반도가 일본에 강점이 되었을 때 벌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은 정부의 성장과 전통적인 사회 구조의 소멸을 촉진시키게 됩니다. 어느 정부도 1914년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한반도는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사회구조가 소멸이 되었다고 합니다.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우리는 여전히 일제 강점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군함도의 사례에서도 알겠지만 조선인의 노동력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으며 지금도 청산이 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일본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소련의 공산주의는 모두 노골적으로 1910년대의 사회동원을 확대하고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김좌진장군의 묘소에는 사람은 없지만 그 의미만큼은 크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무기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일본군 독자개발의 최초의 자동권총은 청산리대첩에서 주력 제식 권총이었으며 38식 보병 소총 역시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사용했던 주력 소총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육국 조병창에서 개발되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군과 북한국에게 사용되기도 했었습니다. 국가는 힘을 가져야 하며 국민 역시 역사속에서 그 의미를 잊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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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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