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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모덕사라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국선열이면서 이땅이 아닌 일본의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이기도 하죠.  올해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이곳 역시 의미있게 다가오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고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냥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며 일본에 항거하다가 세상을 떠난 면암 최익현 선생은 충청남도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청양의 끝자락과 공주의 인근에 자리한 모덕사는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곳으로 명절때 찾아와도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익현은 조선말의 학자인 이항로를 만나서 유학을 배우게 되는데 헌종을 거쳐 철종 1년에 최익현은 이항로를 모시고 설악산을 유람했고 23세 때는 병과로 급제해 주요 관직을 임명받게 됩니다.  

모덕사로 가는길목에는 저수지도 있어서 제사를 지내고 한 번쯤 돌아봐도 좋은 곳입니다.  

아직도 만개한 배롱나무꽃이 있는 청양의 모덕사입니다. 조선말기는 위정척사론과 개화론이 맞서는 양상으로 근대화에 대처했는데 강세는 대원군을 필두로 한 위정척사론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지배를 당하게 되는데 이때를 살았던 인물 최익현 역시 위정척사론의 지주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될 때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게 됩니다.  

여름에만 볼 수 있다는 배롱나무꽃이 아직도 피어 있습니다. 



모덕사에는 최익현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물건도 직접 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철종 13년에 충청도 관찰사 유장환의 처신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자 유장환은 최익현을 안 좋게 평가했는데 이를 보고 최익현은 사직하였다고 합니다.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안보이고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의 모덕사입니다.  

 

송암리 장구(長久) 마을에 최익현이 와서 살았는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06년 청양군내 유림들이 발의, 1913년에 공덕사(恭德祠)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고종의 밀지(密旨) 내용 중 ‘慕卿宿德(그대의 큰 덕을 사모함.)’에서 ‘慕’ 자와 ‘德’ 자를 따서 모덕사라 부르게 된 것이 지금의 모덕사라고 합니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 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면암 최익현이 살았던 공간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데 일부는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너른 마당에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제공이 되어 있어 둘러볼만한 곳이 모덕사입니다.  

명절을 앞두고 시간은 이렇게 지나가지만 그가 남겼던 족적을 만나볼 수 있는 잠시의 시간이 주어지고 있습니다다.

1906년에 73세의 나이에 의병장으로 거병했던 최익현은  고종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흥선 대원군이 계속 섭정하려고 하자 이를 탄핵하는 상소(계유 상소)를 올리고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다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면암 최익현을 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봅니다. 1982년부터 모덕사 관리사무소를 두어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다. 최익현은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병 항일전을 펼치는데 자신의 동족과 전투를 하게 되자 포기하고 일본에 잡힌 후 대마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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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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