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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개국하는데 있어서 충신들이 여럿이 있었지만 그 중에 신숭겸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고 합니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지게 됩니다.

 

오래간만에 소양서원도 만나게 됩니다. 소양서원(경북문재화재자료 505호)은 정언신(우의정), 남영, 심대부(경상도사), 김낙춘, 이심 등 5현을 제향하기 위해 숙종 38년(1712) 설립됐다. 영류정(映流亭)은 소양서원 오른쪽 별도 공간에 있습니다. 순천김씨 인백당 김낙춘의 영류정이라고 합니다. 김낙춘이 가은의 산수에 반해 안동에서 이곳으로 와 소양동 강위에 정자를 세웠다고 합니다. 

신숭겸을 모신 재실이라는 구수재쪽으로 걸어서 들어가 봅니다. 

문경 가은읍의 고려충신유적 정비사업으로 보수 및 사당을 신축하는 공사라고 합니다. 올해 12월 14일가지 진행이 되낟고 합니다. 

신숭겸은 경주에서 왕건을 구하게 됩니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고 합니다. 

 

원래 오래되었던 건물의 구조를 모두 헐어내고 지금은 주춧돌부터 기반공사부터 진행중에 있었습니다. 

 

완전하게 대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숭겸은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게 됩니다. 

새로 건축되게 될 구수재의 너머로 소양서원이 얼핏 보입니다. 

 

우리나라 중요문화재는 거의 대부분 임진왜란 때 박살나고, 서원은 임금들의 철폐령으로 없어졌습니다. 소양서원도 그렇습니다. 영조 때 훼철되고 다시 지은 걸 고종 때 또 훼철되었습니다. 그래도 훼철할 때 사당은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당과 동재가 그 때 모습으로 잘 남아있다고 합니다. 소양서원은 아무튼 1990년에 복원했다니 잘 된 일입니다. 

신씨의 시조이기도 한 신숭겸에 대한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태조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태조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고 합니다. 후백제군은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가게 됩니다. 이후 신숭겸(申崇謙)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太祖)은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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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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