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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에는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데요.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곳이 많아서 찾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서울이나 인천이 아닌 강경에 화교학교가 어떻게 세워졌을까요. 옛날에는 그만큼 강경이 이지역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하고 강경에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것을 보면 이곳이 무역의 거점으로 활용되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경의 화교학교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요.

강경초등학교의 건너편에 조그만한 골목으로 들어가야 강경화교학교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식당옆쪽으로 들어가니 화교학교가 눈에 띄입니다.



아주 옛날에 중국을 가본 기억이 있어서 건물들의 색채를 조금은 알고 있거든요.

중국의 시골에 갔을 때 보았던 건물과 느낌이 비슷합니다.


그래도 옛날 건물들이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요즘에는 화교라고 따로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요. 화교란 중국과 타이완의 국적을 가진 자로 해외에 정착하여 거주하는 중국인이나 그 후손을 의미합니다.


생각보다 부지가 넓은 편입니다. 학교가 맞긴 한것 같은데요. 

이곳에는 교직원이 묵을 수 있는 숙소도 따로 만들어져 있고 실습동과 화장실, 본 건물들이 보존되고 있는 상태인데 이곳을 잘 활용하여 관광자원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925년에 신축된 강경지역 근대 상권의 흥망성쇠를 엿 볼 수 있는 상징적 건물입니다.  교사는 전면에 복도를 둔 목조 건물로 흰색 출입구가 아치형을 이루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택은 부부 교사가 지내던 공간과 독신 교사가 지내던 공간이 따로 나누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학생들이 다니던 곳이라서 시멘트와 철골로 만든 미끄럼틀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요.

이런 미끄럼틀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탈수는 있는 것인가요.  


보통 화교들이 있는 곳을 연상하면 인천의 차이나 타운을 연상합니다. 

한국은 다른 국가와 달리 화교들의 영향력이 크지는 않은 편입니다. 해방직후와 한국전쟁 이후에 적지 않은 화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략 5만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아까본 시멘트 미끄럼틀입니다. 이곳에서 미끄럼을 타면 엉덩이가 다 까지거나 옷이 모두 닳아서 없어질 것 같네요.  



벽도 얇고 전체적으로 난방이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에 사시는 분들이 이곳에서 소규모 경작을 하는지 밭이 조성되어 있더라구요. 




저곳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화교 본건물입니다. 

중국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공간입니다. 시골을 가더라도 분교도 저런식을 지어지지는 않거든요. 




안으로 들어오니까 더욱 중국스러운 느낌이 납니다. 책상과 의자가 함께 있는 형태인데 보통 이런 형태는 초등학교나 중학교가 아닌 대학교를 가야 볼 수 있는데 아주 옛날에도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조금 신기하네요. 정면에 걸려져 있는 사진속의 인물은 한국말로 손문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들은 쑨원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삼민주의로 대표되는 중국의 공화제를 창시하고, 국민 정부 시대에는 중국의 국부(國父)로 일컬어졌던 사람입니다. 타이완에서도 그는 ‘국부(國父)’로 칭송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중국에 대한 애국심이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중국지형도가 한쪽 벽면에 걸려 있습니다. 




교실은 두개가 있는데 중간에 빈 공간 같으면서 교사들이 머물렀을 것 같은 완충 공간이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곳은 다른 교실입니다. 아까본 것과 달리 이곳은 책상과 의자가 따로 나뉘어져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모신다는 공자상이 걸려 있습니다. 


공자하면 유교이고 그의 가르침이 지금도 중국에서는 꾸준하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강경속의 작은 중국을 만나고 싶으신 분은 이곳을 찾아가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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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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