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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하면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라고 말했던 시인 풀꽃의 나태주가 연상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도시에서 어떤 아름다움이 있었을까요. 백제의 아름다운 세공기술은 여러곳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중에서 귀금속으로 귀걸이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주말에도 운영되는 국립공주박물관은 가족끼리 나들이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는 시간은 무언가의 기대감이 들게 합니다.  

耳懸鈴鼻懸鈴(이현령비현령)은  귀걸이와 관련된 속담이기도 합니다. 사실 귀걸이의 디자인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귀금속 중에 가장 다양하지 않을까요.

 

 

무령왕릉이 발굴된 왕조시대에 관을 쓰지 않는다면 귀걸이는 귀금속의 꽃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2023년에도 공주에 자리한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기획전시전으로 백제 '귀엣-고리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전시전이 열리고 있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귀거리와 귀걸이의 의미에 대해 다시 읽어봅니다. 귀엣고리는 귀고리의 옛말로 백제 귀걸이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였다고 합니다. 왕릉 안에는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과 그 왕비임을 알려주는 지석을 비롯한 5천여 점이 넘는 유물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귀걸이는 나태주 시인의 표현처럼 그렇게 자세히 보지 않아도 이쁜 것은 알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귀걸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해 왔다고 합니다. 귀걸이는 귀에 걸어야 되니 고리, 연결고리, 중간장식, 끝장식등으로 구성이 됩니다.

귀걸이는 크기는 작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은 것은 무령왕과 왕비가 양쪽 귀에 달았던 아름다운 귀걸이였습니다. 저도 국립공주박물관을 자주 들러보면서 그 역사와 아름다움에 감탄을 한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백제 귀걸이는 이를 만든 장인과 착용한 사람들의 생각 등 당시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 사용하는 귀걸이는 삼국시대에서 발전되어 오던 고리 모양에서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귓불을 뚫는 것을 금하면서 고리 모양이 점차 사라지고 귓바퀴에 거는 걸이 모양으로 바뀐 것입니다.  백제의 금속공예품은 대부분 화려하게 장식되어 권위를 나타내지만 귀걸이는 상대적으로 간결한 느낌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금은 가장 보존성이 좋으면서도 다루기가 쉬운 금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장식품의 주재료는 금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간결함의 미학은 끝장식을 단순화하여 간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귀걸이라고 볼 수 있다.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던 백제 사람들 역시 모양은 비슷하지만 각기 장식을 달리하며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귀길이를 만들어냈습니다.

무령왕릉에서도 알 수 있뜻이 백제시대에 왕비는 왕의 배우자이자 최상층부의 일원이었습니다. 귀걸이 하나 가지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정치권력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백제와 신라의 왕과 왕비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공주의 무령왕릉과 경주의 황남대총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주와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무령왕릉이 더 가까운 느낌입니다. 무령왕릉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백제시대의 기술이 접목된 귀걸이에 대한 이야기가 즐거운 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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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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