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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 자리한 낙산리 고분군은 대표적인 유적으로 1990년 10월 31일에 사적 제336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면적은 229,245㎡에 이르는 구미에서 가장 큰 고분군입니다. 낙산리 고분군에는 대형분·중형분·소형분 2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3세기에서 7세기 중반기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들로 총 205기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삶이란 양이고 죽음은 음이며 과거는 음이고 미래는 양이라고 합니다. 죽으면 음이 양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로서 사람으로서 존재했던 그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반도에 적지 않은 고분군이 일제 강점기에 발굴이 되었는데 당시 적지 않은 유물들이 도굴이 되었다고 합니다. 발굴과 도굴의 근본적인 다른 점은 발굴은 그 과정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고 도굴은 그 과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고분군을 만들었을까요. 매장은 수혈식(竪穴式)과 횡혈식(橫穴式)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움무덤에서 출발하여 돌널무덤·돌덧널무덤 등이 되었고,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돌방무덤·벽돌무덤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바뀐 대표적인 것이 무덤의 양식입니다. 즉 기념 물화되면서 시설이 확되대고 견고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가을에 만나볼 수 있는 원시형태를 하고 있는 코스모스의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집이나 무덤의 역사도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주역의 원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동굴 속이나 벌판에 살았는데 후에 성인이 나와 주역의 괘상 뇌천대장을 보고 집을 만들었다." 

 


구미 낙산리 고분군은 1915년 일본 학자 구로사카[黑板勝美]에 의해 금오산 고적, 도리사와 함께 1차 조사가 있었고, 이어서 1917년 일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하여 2차 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유지보수와 발굴이 있는지 일부 고분군에는 발굴하는 흔적도 보였습니다.  연차적으로 복원·정비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부대시설도 갖추어져 관광 자원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고분군은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가야와 신라의 무덤 형식이 공존하는 이곳에서는 문화가 어떻게 서로를 닮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전기에는 돌무지 덧널무덤이라는 형식을 왕실과 귀족층에서 애용하였는데, 구덩이를 크게 파고 구덩이벽에 기대어 돌을 쌓고 그 안에 원목(原木)으로 나무덧널을 상자형으로 크게 짜서 설치하고 외면에 돌무지를 쌓았다고 합니다.  

 

 

낙산리에는 대봉감도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신라시대에 일선 관아가 있던 곳으로 문화재로는 선산 낙산리 고분군,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이 있는 낙산리는 냉산 지맥에 둘러싸여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광활한 지역입니다. 왕건이 숭신산성과 태조방천에서 견훤과 싸워 승리한 다음 낙동강 나루를 건널 때 승리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나의 나루(余津) 혹은 고려의 나루(麗津)라는 뜻의 여진이라는 마을도 낙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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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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