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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이 먹고 싶어서 유성으로 갔다가 그냥 들어갈 수가 없어서 조금더 공주쪽으로 가보았습니다.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에서 옆으로 살짝 새면 충현서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조금 해맬수도 있지만 가끔 가보면 익숙한 곳입니다.

 

서원이나 향교를 생각하면 독서를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걸어가는 길에 비유하면 독서는 여행할 길의 지도와 안내를 담아놓은 책을 열어보는 것이고 실천은 말을 먹이고 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다시 책을 살펴 여행을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7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대지 900여 평, 논 1,600평, 임야 6정보 등이 주변에 있습니다. 

충현서원의 사우에는 주자를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7현(七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이 서원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충현서원은 고려시기에 이존오선생을 모신 곳이라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민왕 때 신돈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공민왕의 신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된 사람이 이존오라고 합니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존오가 죽고 3개월 뒤에 신돈은 수원에서 처형되었으며 공민왕은 이존오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추증하였습니다.  젊지만 기개 있는 그를 두고 공민왕은  "나는 이존오의 성난 눈이 두렵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1625년 ‘충현(忠賢)’이라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온 충현서원은 1581년(선조 14) 서기(徐起)에 의하여 주자(朱子)를 비롯, 이존오(李存吾)·성제원(成悌元)·이목(李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셔진 곳입니다. 

충현을 담은 꿈꾸는 서원의 프로그램은 작년에 진행이 되었는데 올해도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보면 능력이 출중하고 똑똑하다고 하여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이 셀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돈의 당여들이 반드시 그를 죽이려고 하였을 때 당시 이존오의 나이는 25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낙향하여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을 못 이겨 세상을 떠난 나이가 향년 31세였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옆 협문(夾門)으로 된 삼문(三門), 6칸의 재실(齋室), 충현서원 사적비, 충현서원 사실 및 송우암추향비, 하마비(下馬碑) 등이 남아 있는 충현서원의 체험 프로그램은 꼬무락 꼬마선비, 공감토그 고청사랑방, 박약당 인성교실, 무한상상 선비놀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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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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