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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다간 역사가 있었던 공간이 있습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없어진 흔적도 있고 다시 생겨난 것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현대화되어 모든 것이 채워졌지만 옛사람의 흔적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대덕구에 살면서 한남대는 몇 번 지나왔지만 이렇게 야외에도 오래된 흔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 공간에는 문인상과 무인상과 석사자, 석탑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온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무인보다 문인에 대한 대접이 고려부터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에 무덤앞에는 문인상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문인과 무인상은 양쪽의 축을 이루어 양반이라고 부르고 있죠.  

한남대의 안쪽으로 들어오면 중앙박물관이 자리한 건물이 있습니다.  그 규모나 자료의 양만 보아도 대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다양한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옛날에 배울 때는 구석기, 신석기였는데 지금은 뗀석기, 간석기라고 불리우는 역사적인 흔적입니다. 대전지역에도 적지 않은 구석기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대전 용호동에서 구석기 유적으로 뗀석기가 어떤 것이 있는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대전리 집자리 복원 모습이 만들어져 있고 다양한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고고학자에게는 과거 사회를 복원하는 기본적인 자료로 토기는 이해되지만 토기는 선사·고대인에게 있어 생활을 꾸려나가는 기본적인 도구였다고 합니다. 

모든 고고자료 중에서 이러한 변화가 가장 빨리,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유물이 토기나 화살촉과 같은 것으로  점토 대토 기는 원형점토대토기에서 삼각구연점토대토기로 변화해 왔다고 합니다. 

 


와질 소성의 토기는 중국의 경우, 신석기시대 후반부터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한나라의 도기를 수용한 낙랑 도기의 영향을 받아 서기전 1세기 후반부터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아서 관심이 없었지만 제가 어릴때만 하더라도 이런 그릇을 사용하는 집안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점토는 500℃ 이상의 열을 가하면, 점토 속에 있는 수분이 증발하여 흙 용기가 되는데, 점토에서 흙 용기로 되는 과정은 바탕흙의 선택과 반죽 등을 통해 성형을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암석의 풍화토가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입자가 아주 고운 점토를 바탕흙으로 사용하고, 막음 장치가 있는 가마에서 굽게 되면, 표면이 회색 또는 회흑색·회청색을 띠는 토기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여러 곳에서 발굴된 토기의 형태는 크게 보아 발형토기(鉢形土器)→옹형 토기(甕形土器)→호형토기(壺形土器)→병형 토기(甁形土器)로의 변화를 보여 오게 됩니다.  

이곳에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발굴된 토기들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대전에서 만나는 진천의 이야기입니다. 진천군 요지들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같아 불을 때는 연소실과 토기가 구워지는 소성실로 구성되었으며, 원삼국시대 초기 요지는 소규모였으나 시기가 내려오면서 점차 그 규모가 확대되고 경사도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만약 무언가를 담아서 먹을 수 있는 다양한 크기의 그릇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다양  토기제작은 점토를 가열해서 물에 용해되지 않는 소성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화학적 변화를 이용한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점토는 섭씨 500℃ 이상으로 가열하면, 점토의 수분이 이탈(화학변화)하여 흙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물질로 바뀌는데 다른 의미의 연금술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토기를 굽는 가마가 경사가 있는 산의 구릉으로 옮겨가면서 경사진 터널식의 가마가 등장하여 1100℃ 이상의 높은 온도를 낼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한남대 중앙박물관에서는 이런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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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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