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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본관과 피가 이어지는 의미를 담은 재실이 곳곳에 남겨져 있는데요. 청주에도 여러곳의 가문의 이야기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 여산송씨은 임진왜란때 왜적을 막다가 전사한 송상현의 본관으로 잘 알려져 있는 성씨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순식간에 함락당한 부산성이후에 동래성을 지키던 동래부사 송상현을 기린 신도비와 묘소가 자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안쪽으로 들어오니 여산송씨 지신공파 충렬공 천곡 종중의 재실인 여천재가 나옵니다. 재실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중부 지방 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실은 선대에서 내려오는 충과 효, 열을 기려 제향하는 전통은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 일임과 동시에 후예를 진작시키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선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접해봅니다.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효를 사회질서의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습니다. 단순히 가족윤리 차원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원리였던 것입니다

여천재가 있는 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송상현의 신도비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묘소는 원래 동래에 있던 것을 1595년 (선조28)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한 것이라고 한니다. 송상현의 본관은 여산이고, 호는 천곡, 시호는 충렬공입니다.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고 합니다.  

송상현은 부친에게 “달빛에 비추인 외로운 성은 줄지어 선 군진을 높은 베개로 삼았고, 군신의 의리가 무거움에 부자의 은혜는 오히려 가벼운 듯 하구나 [孤城月暉列陣高枕 君臣義重父子恩輕]”라는 글을 남기고 순국하게 된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의 묘소를 찾기 위해 걸어서 올라가봅니다. 생각보다 가파른 계단입니다. 그의 절의에 탄복하여 송상현과 그 처의 시신을 동문 밖에 안장하고 나무로 표석을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올라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역시 어떤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와닿네요. 

드디어 송상현의 묘소에 도달하였습니다. 묘역에는 상석과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묘포등이 있는데요. 묘소가 잘 정비된 모습입니다. 

송상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해인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는데, 당시 왜적의 침입이 예상되던 때였으므로 방비에 힘썼지만 동래성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양지바른 곳에 놓여 있는 묘소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생각해봅니다. 한눈에 명당으로 느껴지는 송상현의 묘소에는 금섬과 이양녀의 무덤인 작은 봉분 두 개도 보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송상현은 고민하지도 않고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써서 적진에 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습니다. 

신도비는 1659년(효종 10)에 세운 것으로 방형 대석 위에 높이 280㎝, 폭90㎝, 두께26㎝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얹었으며 그 위에 자리한 묘소에는 송상현이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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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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