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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변의 자리한 강경은 서울의 한강만큼이나 큰 강이 강경읍의 중심을 지나가는 곳입니다. 

대전에도 갑천이 있지만 이정도로 강폭이 넓지는 않거든요. 

이정도로 폭이 넓으니 조선시대와 근대까지 3대 포구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네요. 



너른 금강변을 보기 위해 걸어 올라가 봅니다.



강경읍내의 어느쪽에서 걸어가도 금강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짧은 편입니다. 




천변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자전거길도 잘 만들어져 있는 금강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상시장이 설치되었을 때는 강경의 최대 인구가 3만 여명이었고 유동 인구까지 합치면 10만명이 될 정도로 흥했던 곳이 강경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기차의 발달은 한반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강경의 금강 수운이 빠른 속도로 쇠퇴하게 된데에는 경부선, 호남선, 군산선의 철도가 부설되면서 부터입니다. 



강경의 인구 규모 치고는 상당히 너른 천변길이 펼쳐집니다. 




강경의 상권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매년 하는 강경 젓갈 축제가 열릴 때에는 이곳에도 적지 않은 차량들이 찾아와서 주차난을 겪기도 합니다.  1910년의 강경 사정을 전하는 기록을 보면 “강경의 상업 규모는 군산 다음으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저 곳으로 올라가보면 강경 전망대가 나오는데 강경읍내와 옥녀봉 그리고 주변의 지형을 한눈에 만나볼 수 있습니다.



강경하면 젓갈이 가장 유명하듯이 강경에는 젓갈 전시관도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현재의 강경은 엣날에는 신포 또는 김포라고 불렸던곳입니다. 가장 상권이 발달되었을때의 강경의 시장권은 은진군·석성군·노성군·연산군·부여군·임천군·홍산군·공주군·정산군, 그리고 전라북도의 여산군·용안군·익산군·함열군·고산군·금산군·진산군을 포괄하기도 했었습니다. 



젓갈로 유명한 강경이지만 국내 상품 중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소금이었다고 합니다. 19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강경에는 소금 거래를 중개하는 객주가 30여 호가 있었으며 부두의 한 구역 전체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젓갈 역시 소금이 필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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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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