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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 큰 사찰은 많지 않지만 왕실의 사찰이었던 정림사지가 남아 있어 백제여행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부여로 가서 처음 만난 정림사지는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 백제가 사비시대를 열기 위해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건물 몇동과 정림사지 5층석탑만이 남아 있는 상태지만 백제 기술의 정수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는 곳이죠.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다는 것이 알려진 곳입니다. 



정림사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고리가 눈에 띄입니다.  문고리는  여닫거나 잠그는  쓰기 위해 문틀 달아 놓은 쇠고리를 말하는데요. 어떤 사람과 만남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소통 채널을 막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정림사지 5층 석탑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절제된 균형미와 조화, 무게중심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야 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중에 가장 다가가고 싶으며 부담이 없는 유적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탈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을 의미하는데 그중에 백제역사유적지구가 한국의 12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백제의 독특한 문화, 종교, 예술적 기교를 인정한 것입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라 사람들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정림사지가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여유가 있어 좋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에 한반도에서 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국가가 어디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네요. 




무역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인지한 곳은 아마도 백제였을 것 같습니다. 문화적 교류를 비롯하여 국가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무역의 중요성을 백제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호전적인 고구려나 계속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신라에 비해 백제의 문화가 화려한 발전을 이룬 기반에는 무역이 있지 않았을까요.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불상을 보고 전시관으로 향해 봅니다.



사비시대의 정림사는 웅장하면서 소박했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했다고 합니다. 절제할 때는 절제했었고 화려할 때는 기술을 마음껏 활용해서 과시하듯이 표현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백제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나 작업을 함께하는 느낌입니다. 



박물관에 오면 정림사지의 발굴 당시 모습과 수십년 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곳 박물관의 건물형태는 불교의 상징인 "卍“자 모양으로 중앙홀을 중심으로 진입로, 전시실, 관리실 등이 사방으로 뻗은 날개 모양으로 상호 연계하여 박물관을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림사지 재현되어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중문, 금당지, 강당지 및 그 북·동·서편의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 었다고 합니다. 그 배치 평면과 같은데, 이러한 회랑에 접속된 북· 동·서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 으로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난것이죠.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정림사지 박물관내에는 백제불교문화관, 정림사지관, 뮤지엄샵, 전망카페, 중앙홀, 기획전시실, 수장고, 중앙통제실, 사무실, 영상준비실, 화장실, 뮤지업샵, 창고, 자료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내에는 생각보다 많은 백제의 물건과 불교문화를 확인해볼 수 있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저도 백제금동대향로 기념품이 가지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비싸더라구요. 

부여에는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이었던 성왕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천도로 인해 공주와 부여를 백제의 문화를 간직하고 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 도시로 자리를 잡게 했으며 정림사지는 그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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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느린세상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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