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김좌진 장군은 홍성의 대표적인 인물인데요.

홍성에 가면 김좌진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보았습니다. 홍성에서 김좌진 장군의 차지하는 이미지는 상당히 큰 편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1919년에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총 사령관이 된후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김좌진 생가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는 않은 편이었습니다. 

교육은 뭐니뭐니해도 현장을 찾아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직접 찾아가보았습니다.



입구에서 들어가면 오른편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날은 그냥 김좌진 장군의 일생이 어떠했는지 더 궁금해진 날이어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흔적과 그 기록들이 주변에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쪽에 김좌진 장군 사당이 있는 쪽으로 걸어 올라가봅니다.



위쪽에는 김좌진 장군의 일대기를 만나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책에서는 김좌진 장군의 일대기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냥 언제 태어났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떻게 사망했다라고 나오지 인간에 대해서 조명하는 책도 별로 없고 그럴 정도의 공간도 없으니까요.  




여유로운 사람만이 혹은 의지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이 독립 운동이 아니라 한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었떤 것이 독립운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척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남다른 삶을 살았던 김좌진 장군은 자신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킬 뿐더러 토지를 소작인에게 무상 분배하기까지 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뜻 깊은 일이 될 겁니다.  




청산리 대첩을 이끌며 획기적인 전환의 틀을 마련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합니다.



그래도 그정신을 잊지 않고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군의 감도 출병 이후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 중에 가장 큰규모였던 청산리 전투에서는 최대의 성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다고 합니다. 




복원된 곳이지만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김좌진 장군 집안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면 대단했을 테니까요. 





당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게몽운동을 전개했는데요. 김좌진 장군 역시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지부를 조직하는 등 적지 않은 한민족 정신 계승운동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맑고 곧은 정신이 있어야 큰 일도 해낼 수 있는 법인 것 같습니다. 



태극기앞으로 보이는 김좌진 장군의 모습의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느낌입니다.  





어릴때 김광호와 김복한으로부터 유년시절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김좌진 장군은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느린세상걷기
: